11월1일(금요일) - 근원으로 돌아가라(마22:34-40)

작성자
운영자
작성일
2024-11-01 07:27
조회
249
(도입)
하늘과 땅에 속한 만물은 선함의 근원 가운데 창조가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마귀의 유혹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죄를 범하게 되었고, 그 결과 하나님의 선함의 근원은 악함으로 물들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창조한 피조 세계의 회복을 위해 ‘은혜 언약’(창 3:15)을 발동합니다. ‘창조의 근원’으로 돌아가는 완전한 대속을 이루기 위해 성자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세주인 ‘예수’가 되어주십니다. 그리고 완전한 대속의 값을 이루기 위해 ‘그리스도’가 되어주십니다. 우리로 하여금 ‘천국의 근원’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지금 세상의 영혼들은 죄악의 사슬에 묶여 영적 흑암 가운데 살아가고 있습니다. ‘창조의 근원’으로 돌아가기 위해 영적 흑암 가운데 놓여 있는 영혼들을 일깨우기 위해 우리는 어떤 개혁을 펼쳐나가야 할까요?

(34~35) 지식을 앞세우고 논리적인 것을 제시하는 신앙이 아니라 십자가의 진리를 깨달아 아는 신앙의 근원으로 돌아가는 개혁을 일으켜야 합니다

구원의 진리를 증거하고 있는 예수님을 대항하여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연합을 이룹니다. 이들이 가지고 있는 율법의 지식은 유대 사회로부터 인정받아 왔습니다. 그러나 자신들의 지식으로 만든 율법적 해석과 장로의 유전에 따른 가르침 앞에 유대인도 예외 없이 죄인이라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함께 “죄 사함”이 증거됩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진리에 따른 말씀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이 시대는 지식과 상식이 차고 흘러넘치는 시대입니다. 과학을 바탕으로 한 전문화된 지식은 누가 들어도 “맞다”라고 평가할 정도로 매우 논리적이기도 합니다. 이런 시대를 살아가면서 신앙 또한 믿음이 아니라 논리적인 것을 받아들이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진리를 전문화된 지식에 맞춰 해석하는 경향들이 생겨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지식이 많다고 진리를 아는 것”은 아닙니다. (롬 10:17)은 여기에 대해 분명한 답을 줍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지금의 시대는 논리적 지식을 앞세워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판단하는 새로운 영적 흑암 시대입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진리의 말씀을 증거하는 예수님을 공격하기 위해 ‘율법사’를 세운 것처럼, 지금의 세상은 과학적 지식과 논리를 앞세운 합리라는 형틀 안에서 진리를 짓밟고 있습니다. (행 16:31)에서 증거하고 있는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라는 진리의 복음을 종교적 편견으로 받아들입니다. 마귀가 펼쳐 놓은 새로운 영적 흑암 속에 사로잡힌 결과물입니다. 우리는 이 영적 흑암을 깨뜨려야 합니다. 지식을 앞세워 논리적인 것을 제시하는 신앙이 아니라 ‘십자가의 진리’를 깨달아 아는 신앙의 근원으로 돌아가는 개혁을 일으켜야 합니다.

(36~39) 전인격적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는 신앙과 함께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창조회복을 통해 창조의 근원으로 돌아가는 영적 개혁을 일으켜야 합니다

예수님을 향한 한 ‘율법사’의 공격은 매우 전문성을 띠고 있었습니다. 정중하면서도 곤경에 빠트리기에 충분한 방법을 사용합니다.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당시 바리새파 가운데는 양대 산맥이라 일컫는 ‘힐렐학파’는 (마 7:12)에서 예수님께서도 가르침을 줬던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라는 ‘황금률’의 가르침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랍비 아카비’는 ‘이웃 사랑’을 큰 계명으로 꼽으며, 사람들을 가르쳤습니다. 유대인들은 전체 율법이 가지는 613가지의 법도와 규례를 248개의 중요한 율법과 365개의 덜 중요한 율법으로 구분하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 율법을 가르치는 학파마다 서로 다른 견해들이 펼쳐지면서 율법의 중요성을 통해 논쟁들이 일어나곤 했습니다. ‘율법사’의 날카로운 질문은 여기에 대해 폭탄을 던지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어떤 대답을 내어놓더라도 상대로부터 공격은 피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대해 말씀의 근원이셨던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는 망설임이 없이 답을 줍니다. 답은 ‘사랑’이었습니다.
사랑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모든 학파의 가르침을 담고 있었으며, 율법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그 근원을 돌아보게 합니다. 첫째 되는 계명에 대해 예수님은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라는 계명의 가르침을 줍니다. 이 말씀은 인간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을 깨닫고 창조의 근원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둘째 되는 계명인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라는 말씀에는 ‘하나님 형상의 회복’에 따른 인간 세상을 돌아보게 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과 세상을 향해 전인격적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는 예배의 문화를 바르게 세워 ‘창조회복’을 일으켜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형상에 대한 바른 가치의 회복을 통해 ‘창조회복’을 일으켜야 합니다. ‘창조회복’을 통해 창조의 근원으로 돌아가는 영적 개혁을 일으키는 십자가 군병이 되어야 합니다.

(40)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라는 하나님의 사랑의 속성을 실현시키는 실천하는 사역을 통해 창조회복의 근원으로 돌아가는 개혁을 일으켜야 합니다

‘사랑’은 하나님의 성품인 속성을 가장 잘 나타내는 근본이요, 근원이며, ‘강령’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결여된다든지, ‘하나님의 형상’인 ‘이웃을 향한 사랑’이 결여되는 율법준수는 껍데기에 불과합니다. (롬 13:10)은 증거하기를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 하였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입니다. 창조회복입니다. 하나님을 찬양, 경배하는 ‘창조 회복’의 근원으로 돌아가는 개혁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를 돌아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형상’을 소홀하게 돌아볼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 그리고 ‘이웃을 향한’ ‘강령’은 감성적인 것을 강조하는 것이 아닙니다. ‘창조회복’의 본질, ‘근원으로의 회복’을 말합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하나님의 형상을 미워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라는 하나님의 사랑의 속성을 실현시키는 실천하는 사역을 통해 ‘창조회복의 근원’으로 돌아가는 개혁을 일으키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 그리스도의 군사된 교회와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적용)
지금 이 시대는 제2의 종교개혁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적그리스도화 되어가고 있는 죄악된 세상에서는 참된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라는 ‘창조의 근원’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창조회복’을 일으켜야 합니다. ‘창조회복’을 일으키기 위해서 우리는 두 가지의 분명한 개혁을 펼쳐나가야 합니다. 첫 번째는 ‘십자가의 신앙’입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의 속성을 살린 ‘사랑’의 실천을 통해 ‘창조회복’의 개혁을 일으켜야 합니다. 적그리스화 되어 무너져가고 있는 세상을 ‘창조의 근원’으로 돌아가도록 개혁을 힘 있게 펼쳐나가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