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30일(수요일) - 무엇으로 영생을 얻으리이까(마19: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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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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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30 0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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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입)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부여한 최고의 축복을 말하라고 한다면 그것은 단연코 ‘영생’입니다. ‘영생’의 문제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가장 민감한 사항이 아닐 수 없습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사람을 만드시면서 사람에게 특별한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영생을 누릴 수 있는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사탄의 유혹에 넘어져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죄를 범하게 됩니다. 그로 인해 사람은 영생에 이르지 못하는 죽음의 형벌을 맞이합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한 부자 청년, 그는 인간의 최대 관심사요, 당시 유대 사회에서 화두가 되었던 ‘영생’에 관한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께로 나아옵니다. 예수님 앞에 선 청년은 ‘성자 하나님’이며, ‘생명의 주관자’ 되시는 예수님께 ‘영생’에 관해 질문을 합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이 문제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하셨을까요?
(16~17) 영생은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과 한 몸을 이룬 자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영생’의 문제로 고민하던 부자 청년은 예수님 앞으로 나아옵니다. 그리고 질문을 합니다.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여기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은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것은 오직 한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청년의 질문에 대하여 예수님의 답변은 너무나 뜬금없는 엉뚱한 소리처럼 들릴지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청년이 질문하는 의도를 정확하게 읽으셨고, 그에 대하여 핵심적인 답을 던져주셨던 것입니다. 재물이 많은 청년이 가지고 있었던 ‘영생관’의 문제는 당시 유대 사회에 팽배해있었던 ‘영생에 관한 사고관’이었습니다.
그는 인간의 죄로 인하여 잃어버린 영생의 문제는 그 죄에 해당하는 ‘선한 행위’로 그 죄값이 해결되어진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여기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은 너무나도 명쾌했습니다. “사람이 어찌 선한 일을 할 수 있는가!” 사람은 죄로 인하여 그 ‘본성’이 악해졌기에 어떠한 행위로도 ‘선’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말씀합니다.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을 지키라!” 영생은 우리의 착한 행실이나 봉사와 같은 행위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영생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내가 죄인임을 알고, 회개함을 통하여 주님과 한 몸을 이룰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베푸시는 은혜가 영생입니다. 이 사실과 진리를 우리는 세상 가운데 증거해야 합니다.
(18~20) 영생은 자기 의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부자 청년은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행한 말씀에 대하여 의문을 가지기 시작합니다. “무슨 계명을 지키라는 말씀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제5계명에서부터 제9계명에 이르는 인간 상호관계의 핵심적인 내용을 말씀합니다. 그것은 ‘네가 영생에 이르려고 하거든 너의 이기적인 삶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온전한 삶을 살아가야 하며, 그분의 말씀에 철저히 순종함이 말만이 아니라 그 열매로 드러나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부자 청년의 행동은 하나님의 형상을 향한 진정함이 결여된 것으로, 자신을 나타내는 의식적인 행동들이었습니다.
청년은 모세의 율법을 비롯하여 장로들의 유전과 전통에 이르기까지 종교의식을 착실히 지켰던 자입니다. 종교적인 행위론자는 자신의 행함을 통하여 ‘자신의 의’를 드러내지만, 신앙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그 말씀을 따라 지켜 준행하는 것을 통하여 자신의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와 공의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냅니다. 영생은 자기 의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영생은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다는 사실을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깨달아 알도록 해야 합니다.
(21~22) 영생은 언약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발동으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청년은 말하기를, 자신은 하나님의 말씀을 철저히 ‘지킨 자’였으며, 그런 자신이 아직도 무엇을 더 지켜야 하는지 반문합니다. 이런 청년을 향하여 예수님께서는 일침을 가합니다.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이것은 자신의 종교적인 행위의 우월성을 드러내고 있는 청년을 향한 결정타였습니다. 자신의 종교적인 행위를 자랑하는 청년을 향하여 그의 신앙이 얼마나 가식적인 행위였는지 증명하고 있습니다. 그 청년이 계명을 지키고 준행한 것은 하나님 나라를 향한 ‘언약백성’으로서 마땅히 행할 바를 행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그는 땅 위의 유익함을 위하여 종교적인 행위를 하는 자였습니다. 그러니 그는 자신의 물질을 온전히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위하여 내어놓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영생을 얻을 자는 종교적인 행위를 통하여 땅위의 유익함을 구하는 자가 아니라, 하늘의 ‘보화’를 바라보며, 자신의 마음이 온전히 하나님께로 향하는 자입니다. 이런 자는 자신의 전부인 두 렙돈을 하나님께 드리고도 오히려 자신이 하나님께 소홀하였음을 가슴 아파하는 자입니다. 하나님은 행위가 아니라 그 사람의 마음에 있는 중심을 봅니다. 하나님은 형식을 갖추어 하나님께 자신의 ‘의’를 드러내는 가인과 같은 자가 아니라 ‘하나님이 자신의 전부’였던 아벨과 같은 자를 원한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적용)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진정한 ‘보화’는 온 우주를 다 주고도 이 땅에서는 살 수 없는 것입니다. 진정한 보화는 ‘영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영생’의 보화를 얻기 위해서는 자신의 것을 다 팔아서라도 그것을 사는 자가 복이 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영생’은 이 땅에 있는 모든 보화를 다 주고도 살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영생’은 ‘거듭난 자’ 즉, ‘중생한 자’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늘의 보화인 ‘영생’은 믿음으로 예수를 온전히 따르는 자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무엇으로 영생을 얻으리이까?” 영생은 부자 청년의 생각처럼 헐벗고,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을 도왔다고 이루어지거나, 자신이 드렸던 헌금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영생!’ 그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하는 자에게만 주어지는 하나님의 가장 큰 선물인 ‘보화’입니다. 세상의 어떤 값진 것과도 바꿀 수 없는 ‘보화’입니다. 아직도 이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는 세상의 영혼들에게 이 진리를 알게 하고, 깨닫게 하는 일에 헌신적인 자세로 임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부여한 최고의 축복을 말하라고 한다면 그것은 단연코 ‘영생’입니다. ‘영생’의 문제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가장 민감한 사항이 아닐 수 없습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사람을 만드시면서 사람에게 특별한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영생을 누릴 수 있는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사탄의 유혹에 넘어져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죄를 범하게 됩니다. 그로 인해 사람은 영생에 이르지 못하는 죽음의 형벌을 맞이합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한 부자 청년, 그는 인간의 최대 관심사요, 당시 유대 사회에서 화두가 되었던 ‘영생’에 관한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께로 나아옵니다. 예수님 앞에 선 청년은 ‘성자 하나님’이며, ‘생명의 주관자’ 되시는 예수님께 ‘영생’에 관해 질문을 합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이 문제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하셨을까요?
(16~17) 영생은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과 한 몸을 이룬 자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영생’의 문제로 고민하던 부자 청년은 예수님 앞으로 나아옵니다. 그리고 질문을 합니다.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여기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은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것은 오직 한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청년의 질문에 대하여 예수님의 답변은 너무나 뜬금없는 엉뚱한 소리처럼 들릴지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청년이 질문하는 의도를 정확하게 읽으셨고, 그에 대하여 핵심적인 답을 던져주셨던 것입니다. 재물이 많은 청년이 가지고 있었던 ‘영생관’의 문제는 당시 유대 사회에 팽배해있었던 ‘영생에 관한 사고관’이었습니다.
그는 인간의 죄로 인하여 잃어버린 영생의 문제는 그 죄에 해당하는 ‘선한 행위’로 그 죄값이 해결되어진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여기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은 너무나도 명쾌했습니다. “사람이 어찌 선한 일을 할 수 있는가!” 사람은 죄로 인하여 그 ‘본성’이 악해졌기에 어떠한 행위로도 ‘선’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말씀합니다.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을 지키라!” 영생은 우리의 착한 행실이나 봉사와 같은 행위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영생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내가 죄인임을 알고, 회개함을 통하여 주님과 한 몸을 이룰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베푸시는 은혜가 영생입니다. 이 사실과 진리를 우리는 세상 가운데 증거해야 합니다.
(18~20) 영생은 자기 의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부자 청년은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행한 말씀에 대하여 의문을 가지기 시작합니다. “무슨 계명을 지키라는 말씀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제5계명에서부터 제9계명에 이르는 인간 상호관계의 핵심적인 내용을 말씀합니다. 그것은 ‘네가 영생에 이르려고 하거든 너의 이기적인 삶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온전한 삶을 살아가야 하며, 그분의 말씀에 철저히 순종함이 말만이 아니라 그 열매로 드러나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부자 청년의 행동은 하나님의 형상을 향한 진정함이 결여된 것으로, 자신을 나타내는 의식적인 행동들이었습니다.
청년은 모세의 율법을 비롯하여 장로들의 유전과 전통에 이르기까지 종교의식을 착실히 지켰던 자입니다. 종교적인 행위론자는 자신의 행함을 통하여 ‘자신의 의’를 드러내지만, 신앙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그 말씀을 따라 지켜 준행하는 것을 통하여 자신의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와 공의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냅니다. 영생은 자기 의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영생은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다는 사실을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깨달아 알도록 해야 합니다.
(21~22) 영생은 언약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발동으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청년은 말하기를, 자신은 하나님의 말씀을 철저히 ‘지킨 자’였으며, 그런 자신이 아직도 무엇을 더 지켜야 하는지 반문합니다. 이런 청년을 향하여 예수님께서는 일침을 가합니다.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이것은 자신의 종교적인 행위의 우월성을 드러내고 있는 청년을 향한 결정타였습니다. 자신의 종교적인 행위를 자랑하는 청년을 향하여 그의 신앙이 얼마나 가식적인 행위였는지 증명하고 있습니다. 그 청년이 계명을 지키고 준행한 것은 하나님 나라를 향한 ‘언약백성’으로서 마땅히 행할 바를 행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그는 땅 위의 유익함을 위하여 종교적인 행위를 하는 자였습니다. 그러니 그는 자신의 물질을 온전히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위하여 내어놓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영생을 얻을 자는 종교적인 행위를 통하여 땅위의 유익함을 구하는 자가 아니라, 하늘의 ‘보화’를 바라보며, 자신의 마음이 온전히 하나님께로 향하는 자입니다. 이런 자는 자신의 전부인 두 렙돈을 하나님께 드리고도 오히려 자신이 하나님께 소홀하였음을 가슴 아파하는 자입니다. 하나님은 행위가 아니라 그 사람의 마음에 있는 중심을 봅니다. 하나님은 형식을 갖추어 하나님께 자신의 ‘의’를 드러내는 가인과 같은 자가 아니라 ‘하나님이 자신의 전부’였던 아벨과 같은 자를 원한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적용)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진정한 ‘보화’는 온 우주를 다 주고도 이 땅에서는 살 수 없는 것입니다. 진정한 보화는 ‘영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영생’의 보화를 얻기 위해서는 자신의 것을 다 팔아서라도 그것을 사는 자가 복이 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영생’은 이 땅에 있는 모든 보화를 다 주고도 살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영생’은 ‘거듭난 자’ 즉, ‘중생한 자’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늘의 보화인 ‘영생’은 믿음으로 예수를 온전히 따르는 자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무엇으로 영생을 얻으리이까?” 영생은 부자 청년의 생각처럼 헐벗고,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을 도왔다고 이루어지거나, 자신이 드렸던 헌금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영생!’ 그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하는 자에게만 주어지는 하나님의 가장 큰 선물인 ‘보화’입니다. 세상의 어떤 값진 것과도 바꿀 수 없는 ‘보화’입니다. 아직도 이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는 세상의 영혼들에게 이 진리를 알게 하고, 깨닫게 하는 일에 헌신적인 자세로 임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